책 {분노의 포도} 절망 위에 선 가족, 가난보다 깊은 상처, 연대의 품격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없다면 나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지 못한다. 그것은 나 자신, 가족, 명예 등등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의 포도}는 세계 최악의 경제 침체 속에서 자신의 가족들과 자기 자신을 지키고 가장으로서 다시 가정을 일으키기 위한 한 남자의 처절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놀라운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닌, 그 시절 많은 가정들의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국에도 있었던 보릿고개 시련기도 있고, imf를 생각하며 독서한다면 공감과 이해가 빠를 것이다.
1. 절망 위에 선 가족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더스트 보울 재난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한 사회 비판적 성격을 지닌 리얼리즘 소설이다. 오클라호마 출신의 조드 가족이 새로운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여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1인칭 시점의 몰입이 가능하다. 줄거리는 경제 붕괴와 자연 재해로 인해 농토를 잃고 쫓겨난 이 가족은 트럭 한 대에 모든 삶을 싣고 떠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이주민에 대한 차별, 착취, 굶주림, 그리고 희망의 붕괴였다.인공 톰 조드는 과거 살인죄로 복역한 뒤 가석방되어 돌아오지만, 이미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은 상태다. 그들은 ‘황금의 땅’이라 불린 캘리포니아에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떠나지만, 현실은 그들을 가혹하게 짓밟는다. 노동은 넘쳐나고 임금은 턱없이 낮으며,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조드 가족은 여행 중 가족 구성원을 하나둘 잃고 해체되어 가지만, 그 속에서 더 강한 연대와 연민이 싹트기 시작하는 모든 과정을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가장 온전하고 완전한 형태의 사랑은 무엇인가? 아마 모성애와 핏줄을 나눈 가족들 사이의 사랑일 것이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는 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절망 속에서도 연대를 통해 인간 존엄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한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 톰은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존재로 거듭나며, “나는 어디에나 있다”는 선언은 억눌린 자들의 집단적 자각과 저항 의지를 상징한다. 소설은 특정 시대를 살아간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폭력, 계급 갈등, 그리고 인간 존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분노의 포도}는 단순한 현실 고발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의 의미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질문한다. 그리하여 고통받는 자들이 서로를 돌보고 손을 맞잡을 때, 진정한 희망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독자에게 조용히 전한다.
2. 가난보다 깊은 상처
독서를 하기 전, 가장 필수적인 작업이 있다. 바로 시대적 배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 작업이 가장 필요한 책이 {분노의 포도}이다.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알아야 책을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가능하다. 경제 대공황은 1929년 뉴욕 증시 붕괴로 시작됐지만, 그것이 평범한 농민의 삶에 미친 충격은 단순한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파괴였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사람들의 생계는 땅과 밀접히 닿아 있었다. 땅은 생명줄 같은 존재였고, 그 땅을 잃는다는 건 '정체성의 말살'을 의미했다. 조드 가족은 기계화 농업의 확산과 은행의 대량 토지 압류로 인해 살던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즉, 경제 대공황은 단지 "빈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게 만든 조건을 강요한 셈이다. 존 스타인벡은 바로 이 '쓸모없어지는 인간'의 비극을 그린다. 조드 가족이 고향을 떠나는 장면에서, 트랙터를 몰고 온 이는 같은 동네 사람이지만, 그의 말은 차갑다. "나는 단지 일을 하는 거야. 회사에서 하라는 대로." 이건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구조 안에서 얼마나 쉽게 비인격화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대공황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도 연대와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작지만 위대한 발버둥이 거룩하게 다가온다. 이 부분에서 난 {분노의 포도}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3. 연대의 품격
{분노의 포도}는 단순히 한 가족의 이주기를 담은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존엄을 지키려 애쓰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서사시다. 조드 가족이 겪는 가난, 굶주림, 그리고 뿌리 뽑힌 존재로서의 상실감은 지금을 사는 나에게도 강한 울림을 남긴다. 특히 토마토가 썩어가는 장면은 단순한 현실의 묘사를 넘어, 인간 사회가 만든 경제 시스템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지를 고발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먹을 것이 있지만 굶는 이들이 존재하는 세계, 노동은 있지만 대가가 없는 세계, 땅은 있지만 머물 곳이 없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점점 말라간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 오히려 ‘연대’와 ‘공존’이라는 가치를 싹 틔우려는 모습이었다. 마와 톰, 케이시 같은 인물들은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돕는다. 이는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로 느껴졌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결국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용기 때문이 아닐까. 끝내 마가 젖이 도는 가슴으로 굶주린 타인을 품에 안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 존엄성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잃은 이가 아직도 남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분노의 포도}는 과거의 기록이 아닌 오늘의 이야기다. 빈곤, 불평등, 환경 위기, 노동 착취, 이 모든 것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지닌 본성과 윤리, 그리고 연대의 의미를 다시금 되묻게 되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시대에,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용기는 얼마나 숭고한가. 이 책은 우리 모두가 가난하고 벗겨진 ‘존엄’을 다시 붙잡아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