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실용 정치, 배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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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왕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엔 언제나 두 명의 왕이 이름을 올린다. 세종대왕과 정조이다. 세종대왕은 널리 알려진 반면 정조는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등장했으면 좋겠는 정치인으로 정조는 꾸준히 이름을 올린다.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에서는 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1.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조선 후기의 군주 정조는 단순히 총명하고 개혁적인 임금이라는 평가만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복합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을 극복하고 즉위한 이후, 권위와 정당성을 동시에 요구받는 입장에서 철학적 비전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꾀했다.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는 이러한 정조의 고뇌와 시도, 그리고 그가 추구한 정치 철학을 ‘철인 정치’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며, 정조가 어떤 방식으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동시에 구현하려 했는지를 조명한다. ‘철인 정치’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국가} 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철학자가 통치해야 정의로운 국가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 개념을 동양적 유교문화권에 이식한 인물이 바로 정조였다. 그는 성리학적 이상주의를 정치적 지침으로 삼되, 그것을 경직된 교조주의가 아닌 현실적 유연성을 동반한 정치 원리로 작동시키려 했다. 예를 들어, 정조는 유교적 명분에 충실하면서도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개혁 정책들을 다수 시행했다. 규장각 설치, 화성 건설, 탕평책 강화, 신분 완화 정책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은 늘 저항과 긴장의 대상이었다. 왕권 강화와 기득권 균열을 동시에 꾀한 그의 정치 방식은 보수적 사대부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일부 개혁은 구조적 제약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정조가 가진 정치적 고립감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상을 버리지 않았던 정신적 강인함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철인 정치를 단지 ‘좋은 정치’로 추상화하지 않고, 실제 제도와 인재 정책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점은 오늘날에도 시사점이 크다. 정조는 군주의 도덕성, 철학적 내면, 정책적 능력의 통합을 이상적인 리더십의 조건으로 보았다. 그는 단순히 인사를 잘하거나 정책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란 백성을 향한 철학적 책임임을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래서 정조에게 있어 정치란 지배가 아닌 설득과 공감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근본적으로 백성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지향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정조는 단지 강력한 왕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움직이는 '생각하는 군주'였다. 그는 ‘덕과 법’을 조화시키려 했고,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했다.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는 정조의 삶과 정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치밀하게 분석하며, ‘정치는 철학 없이 가능한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정조의 정치는 완벽하진 않았으나, 그가 보여준 ‘생각하는 권력’의 가능성은 오늘날 리더십에 대한 중요한 반성과 통찰을 제공한다.

2. 실용 정치

정조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실용 정치' 이다. 실제로 오늘날 정조의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수원 화성으로 수도 이전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추진한 수많은 개혁의 중심에는 언제나 ‘백성’이 있었다.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는 정조의 이상주의가 단지 추상적 도덕주의에 머물지 않고, 사회 구조와 제도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정조는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효과적인 실용적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정치적 정체 상태에 돌파구를 마련했다.정조의 대표적 실용 행정 중 하나는 규장각의 설치였다. 이는 단순히 학문 연구 기관을 세운 것이 아니라,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해 왕권을 보좌하고,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노론에 견제 장치를 마련하려는 정치적 의도였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서얼 출신을 대거 등용한 것도 파격적이었다. 당시 서얼은 천시받던 신분이었으나, 정조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통해 점진적으로 신분 제도의 벽을 허물고자 했다. 이처럼 정조는 조선 후기의 경직된 신분 질서를 유연하게 흔들면서도 큰 충돌을 피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전개해 나갔다. 또 하나의 상징적 업적은 수원 화성의 건설이다. 이는 단순한 도시 계획을 넘어선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합 프로젝트였다. 수원 화성은 사도세자의 묘를 중심으로 한 효심의 표현이면서도, 전략적으로 수도 한양을 보조하는 거점 도시로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다. 건축 과정에서 거중기 같은 신기술을 활용하고, 대규모 백성 고용을 통해 민생을 도운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조는 화성의 건설을 통해 새로운 통치 모델을 실험했으며, 이는 근대적 도시 개념의 싹을 보여주는 기획이었다. 정조의 실용정치는 완성형이 아니었다. 한계도 분명했고, 그가 이룬 개혁은 그의 사후 후속 군주들에 의해 무력화되거나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가 남긴 흔적은 분명히 조선 후기의 정치적 상상력을 넓혔다. 그의 개혁은 ‘변화는 가능하다’는 희망을 남겼으며, 권위와 통찰, 민심과 제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례가 되기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3. 배울점

아쉽게도 정조가 현대 시대에 등장하는 건 무리가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를 독서하고 정조의 가르침을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정조의 리더십은 결과 중심의 실용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정의, 미래에 대한 통찰로 뿌리내린 ‘철인 정치’였다. 그 철학은 지금도 유효하며, 특히 가치 중심의 리더십이 실종된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한 울림을 남긴다. 그래서 난 세가지 정조의 가르침 중 실생활에 적용 가능한 것들 세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는 신뢰와 존중의 정치다. 그는 무력이나 억압보다 설득과 교육을 우선시했다. 이는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정조가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반영한다. 그는 인재를 고르게 쓰되, 정치적 입장보다는 능력과 신념을 기준으로 삼았다. 반대 세력이라도 명분이 있으면 경청했고, 지지 세력에게도 무조건적인 특혜를 주지 않았다. 둘째, 정조는 리더 자신부터 학습하고 성장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왕이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밤늦도록 책을 읽고, 지식인들과의 토론을 즐겼다. 자신이 먼저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조직을 이끄는 이들이 갖춰야 할 리더십의 중요한 미덕이다. 셋째는 정조의 감정 통제력과 윤리적 판단력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정치적 운명은 그에게 적잖은 상처와 분노를 남겼지만, 정조는 이를 분출의 이유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처를 공동체의 치유로 전환하려 했다. 복수를 위해 정치를 하지 않았고, 자신이 받은 아픔을 이유로 더 나은 제도를 설계했다. 이 책을 독서하는 내내 지금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단지 제도나 정책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이끄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것은, 아마도 정조 같은 윤리적 리더, 배움과 책임을 실천하는 철인의 재 등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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